연두빛 물결로 일렁이는 질박한 봄입니다. 키 맞춰 머리를 자른 도로 옆 은행나무에서도 새 순이
돋아납니다. 햇볕이라고는 구경 못한 뒷마당 콘크리트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민들레꽃이
사랑스러워 눈물이 납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새끼고양이처럼 가냘픈 싱그러움이 노랗게 번집니다.
돌담 틈에 빨갛게 피어난 영산홍을 보고 있자니 엄마 생각이 납니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시던 엄마.
그러나 아버지는 마당가에 잡초가 자라는 꼴을 보기 힘들어 하셨습니다. 엄마가 애써 가꿔 놓은 꽃이랑
나물들을 아버지는 잡초라 여기시고 제초제를 뿌려서 노랗게 만들곤 하셨지요. 그런 날 아침에 엄마는
언성을 높이시며 꽃이랑 잡초도 구별 못하냐며 아버지를 책망하셨습니다. 나도 세심하지 못한 아버지를
속으로 원망하곤 했습니다.
라일락 꽃향기가 마당을 가득 삼킵니다. 고향집 울타리에 두릅 순이 지천일 텐데 올해도 먹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엄마는 두릅 순이 한 뼘만큼 자라면 늘 전화를 하셨습니다.
“언제 안 오냐? 한창 맛있다”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다녀가라는 기다림의 표시이자 딸에게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랑표현의
방식임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가끔은 택배로 고향의 봄을 배달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두릅이랑 달래랑,
몇 가지의 나물들과 된장, 고추장 이었는데 풀러 놓고 보면 별로 먹을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머금고 온 고향집 냄새와 엄마의 사랑 때문에 가슴이 저리면서도 따뜻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의
사랑을 받아볼 수 없습니다. 받는 것은 그만하고 나도 이제는 주기만 할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어제는 이른 아침 이불속에서 뒤척이고 있는데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너 오늘 농장에 있냐? 더덕을 좀 캤는데 가져다주려고 그런다. 콩도 한말 가져가고”
멀리 있는 막내딸 소식이 궁굼 하셨나 봅니다. 그러나 선뜻 오시라고 말을 못하고 다른 핑계를 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주말에 한 번 갈께요. 여기까지 오시려면 힘드세요. 오빠도 주말인데 좀 쉬어야지요”
엄마 대신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게 이렇게 어색할 줄 몰랐습니다. 집에만 계시니 자식들 주말에 왔을 때
이곳저곳 구경하러 다니고 싶은 마음이야 십 분 헤아리지만 오빠 생각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말렸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려 옵니다.
“그렇지? 그래 알았다. 언제 다녀가라”
아버지는 그렇게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흩어집니다. 엄마의 사랑 뒤에 숨어 있던
아버지의 사랑을 엿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어설픈 사랑이
자연스럽게 전해 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받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받는 것에 익숙해져서 사랑을 주기만 하는데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내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박목월시인의 (가정)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온
아버지가 아랫목에 놓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 같은 것들을 바라봅니다.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인은 말합니다.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