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켭니다. 까만 심지에 불을 당기니 파리한 불꽃 위로 불기둥이 피어납니다. 제 몸을 녹여가며
불꽃을 사르고 있는 촛불을 보니 엄마 생각이 납니다.
새벽 어스름이 창문에 비치면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와 알싸한 담배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옵니다.
담배 연기가 하얗게 스며들고, 파리한 새벽을 안개가 가로지르면 엄마는 늘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으셨
습니다. 나지막한 촛대 위에 타오르는 불꽃이 엄마 얼굴에 일렁이면 나는 베개를 밀어 버리고 엄마 무릎을
파고들어 베고 누웠습니다. 한 손엔 묵주알을 세시고, 한 손으로는 잠자는 내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그 손길이 얼마나 다정했는지 모릅니다. 사랑과 평화의 손길이었음을 지금 와서 깨닫습니다.
지인이 대봉감 한 박스를 보내왔습니다. 혼자서 들기가 힘들 정도로 큰 박스에 주먹 만한 감들이 말갛게
담겨 있었습니다. 홍시 되는 속도가 제각각 일 듯 해 한눈에 볼 수 있게 베란다 창틀에 쪼옥 늘어 놓았습니
다.한줄로는 어림도 없어서 두 줄로 나열해 놓고 보니 입가에 흐믓한 미소가 가실 줄 모릅니다. 겨우내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 할 것 같아 봉긋한 녀석들을 몇 번이나 쳐다봅니다. 돌아가신 엄마가 앉은 자리
에서 몇 개씩이나 드시던 홍시였는데, 떫어서 먹지도 못하는 땡감을 보고도 입이 귀에 걸리는 걸 보면
영락없는 엄마 딸인가 봅니다.
어릴 적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엄마를 따라 장엘 갔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과 밭을 지나고 신작로를
따라 걷다가 고갯마루에서 지름길로 빠집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시골 신작로는 위험해서
되도록 이면 산길로 다녔습니다. 동네 경운기라도 얻어 타는 날은 운이 좋았지만 대부분 한 시간 남짓
걸어 다녔습니다. 그런 날 빠질 수 없는 일 한 가지가 자장면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졸업식 날에나
먹을 수 있는 자장면을 엄마는 장날에 가끔 사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릇 가장자리에 엉겨 붙은 자장의
흔적까지 지우고는 노란 단무지로 아쉬움을 달래곤 했습니다.
난전에 말갛고 탱글한 홍시가 올라 앉은 늦가을 장터를 엄마는 좋아하셨습니다. 시장 어귀에서 미리
점찍어 놓았다가 장거리를 다 산 후에 맨 마지막으로 향합니다. 비닐봉지에 두꺼운 박스 쪼가리를 넣고
말랑한 녀석들을 조심스레 담고는 장바구니 맨 위에 얹습니다. 그때부터 고행이 시작됩니다. 행여나
터질까 조심스러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그런 날은 서산마루에 노을이 홍시보다 더
붉게 물들었습니다.
어릴 적 고향은 꽤나 추운 곳이었습니다. 해발이 높아 겨울이 빨리 오고 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추위에
약한감나무나 사과나무는 우리 동네 뿐 만 아니라 인근 동네에도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이야
온난화 여파로 동네에도 사과나무랑 감나무가 즐비하고 워나 먹거리가 많다보니 홍시가 그때만큼
맛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홍시가 될 땡감들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엄마는 분명 행복해 하셨을
것입니다
엄마의 다정한 손길이 사뭇 그리워집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홍시처럼 말랑해지고 터질 듯이 부풀어 오릅니다. 특별하지도 않았던 소박한 일상이 이렇게
흐믓한 추억으로 다가오는 것은 현재의 삶이 메말라서 인가 봅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추억을 남기는
엄마일까, 먼 훗날 어떤 엄마로 추억될까 조바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님을 압니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 오늘 저녁엔 세 녀석들을 꼬옥 안아주어야 겠습니다.
리오바
저도 어릴적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시골생활들...그때가 그리워 지는건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겠죠?
나훈아의 홍시 노래가 떠오르네요
자매님~건강하세요^^
